【인터뷰】전통음식연구가 이선희 선생

최미향 기자l승인2018.10.10l수정2018.10.10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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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음식연구가 이선희 선생

 

<탐라에서 백두까지> 주제로 국제요리대회 대통령상 수상

이북김치부터 대한민국 팔도 김치 120가지 선보여

 

(대문을 열며)

늘 느끼는 것은 그녀의 손끝이 참 맵다는 것이다. “어쩜 이렇게도 예술적 감각이 살아있을까요? 저는 볼수록 감탄만 나옵니다.” 기자의 말에 지나는 아이가 벤치에 앉은 우리를 흘깃 쳐다보며 엄마 손에 매달려 뭔가를 속삭였다.

“아, 잠깐만요.” 이선희(41) 전통음식연구가가 조심스레 기자의 손에 들려져 있는 상자를 건너다보며 “선물로 드린 한과 위에 기자님께 특별히 드리려고 새긴 단어가 있어요.”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벤치 위에 앉은 우리 위로 가로등 불이 켜졌고, 소박한 별들이 하나 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써진 작고 앙증맞은 글귀 하나.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만든 한과를 필자에게 곱게 포장하여 선물해 주었다.

운 좋게도 어디선가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10월>이 가을밤을 수놓았다.

“귀한 분들께 선물로 드리려고 몇 박스 만들었습니다.”

“그럼 저도 귀한 분인가요?”

“굳이 말하자면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언니’입니다(웃음)”

그녀는 멋지고 따스했으며 과장된 표현을 좀 빌리자면 필자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하는 전통음식연구가다.

 

▲ 떡으로 만든 야채들

 

# 요리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장 값진 유산

(이) “비 오는 날의 우리 집 풍경은 늘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어 있곤 했습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다보면 부침개 냄새가 골목을 물들이곤 했죠. 저희 아버지가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격이셨거든요.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애꿎은 저희 어머니만 죽어라 손님상을 차려야 했습니다.” 기자가 그녀의 말에 “시골에 내리는 비가 사람을 부르는 비라면, 도시에 내리는 비는 사람 등을 떠미는 비라고 누가 그러더라구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맞아요. 우리 집은 시골이라 사람을 부르는 비였어요. 그 비는 아버지의 발품을 묶어 금세 잔치 집으로 만들어 버렸죠. 음식 솜씨가 워낙 좋은 어머니는 갑작스레 손님이 오셔도 어디에서 재료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금세 한상 뚝딱 차려 나오셨지요. 그런 당신의 솜씨에 은근 뿌듯해 하신 어머니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지요?(웃음)

지금 제가 요리하는 것은 어쩌면 저희 어머니가 물려주신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란 저의 기억이 제 손끝으로 베어 나오는 것 같은....” 그녀가 자신의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기에 기자도 그 눈길을 따라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저 가녀린 손가락으로 필자에게 한과를 만들어 선물했다고 생각하니 입에 넣기가 조심스럽다. “어쩜 이렇게 맛있어요. 뭣보다 먹기가 아까워서 못 먹겠습니다.” 라고 기자가 말하자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머니의 솜씨를 잠시 기억해 냈을 뿐”이라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아버지를 닮아 손끝이 매운 덕분에 만들기 숙제는 언제나 내 차지

(이) “워낙 손재주가 좋으신 아버지였습니다. 제가 아마도 손끝이 맵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것은 그런 아버지를 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뭐든 만드는 걸 좋아해 방학 때면 으레 사촌언니 만들기 숙제는 제 차지였습니다. 시골이니 문구점이 있기나 했나요. 그러다보니 재료들은 모두 제 주위에 있는 재활용 내지는 시골에서 나는 천연재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 손을 거쳐 간 방학숙제는 늘 상장을 받아오는 효자들이었어요.

“선희야 이번에도 니 덕분에 상 받았어. 니 손은 정말 마이더스의 손이야.”라며 치켜세워 주는 것에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저는 우쭐해 하며 ‘다음에는 또 어떤 재료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구요. 그렇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 나가는 사이에 필자의 손에는 벌써 세 개째의 한과가 들려져 있었다. 먹기에도 아까울 정도의 고급스런 포장과 달콤한 맛이 우리에게 익숙한 광고가 생각났다. ‘손이가요 손이가... 어른 손 아이 손 자꾸만 생각나’

 

# 작은 시골 아이의 눈에 비친 악기 트럼펫, 처음으로 내게도 꿈이 생겼다.

(이) “어느 날부터인가 5학년, 작은 시골 아이의 눈에 비친 악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TV 속에서는 추모행사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작은 악기 하나가 높은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지는 겁니다.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무엇보다 얼마나 고급지고 화려하던지 악기를 불고 있는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봤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왕의 권위와 품격을 상징하듯이 웅장했지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트럼펫은 전쟁 때 신호나팔이나 왕이 등장할 때 울리는 팡파르 악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을요.

그때부터 트럼펫을 배우고 나중에 오케스트라 요원이 되어 멋지게 무대에 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마우스피스에 입을 대고 불어 관내의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려면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아 그날부터 복식호흡을 연습했구요. 꿈을 꾸면서 보내는 중학시절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고교 진학 원서를 쓰던 날, 부모님께 그동안 침묵했던 저의 꿈을 얘기했습니다. 항상 제가 하는 말은 뭐든 응원해주셨던 분들이라 별 걱정 없이 ‘아버지 나 트럼펫 배우고 싶어요.’라며 조심스레 말씀드렸죠. ‘화려하고 밝은 음색을 지닌 금관악기인데, 금관악기들 중에는 가장 역사가 깊은 것이 바로 트럼펫이예요.’ 그길로 뛰어가 책꽂이에서 그림 한 장을 펴보였습니다. ‘이 악기가 트럼펫이예요 아버지. 저 이거 꼭 배우고 싶어요.’ 제 말을 듣고 계시던 두 분은 안색이 변하시더니 ‘절대 안된다!’는 말씀과 함께 밖으로 나가버리셨습니다. ‘싫어요. 싫어요. 트럼펫을 전공하고 싶어요.’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이 멍든 것처럼 아팠고 가슴은 빨래를 쥐어짜듯 답답했어요. 그동안 몇 번이고 쌓아 올렸던 저의 꿈이 일순간 물거품이 되니 길을 잃은 아이처럼 사방이 흔들렸습니다.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의미가 없었어요.”

 

#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 하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아낌없이 도와주셨던 부모님.

(이) “두 분의 반대에 어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떼를 쓰며 우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두고 1시간 거리의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었어요. 두 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저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세상으로 탈출을 시도한 개구리마냥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탈출은 제가 보도 듣도 못한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먼저 음악이 저를 바로 세워주었고 다음으로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도 입학했겠다. 이제 해야 하는 건 악기를 사고 배워야 하는 것이었어요. 악기가 과자 값도 아니고 얼마나 비쌉니까. 지금처럼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어요. 부모님께 손을 벌여 ‘악기를 사고 배워야하니 돈을 보태 달라.’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부모님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며 거절하셨지요. 물론 저도 압니다. 시골에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것도 고액 레슨비를 갖다 바치려면 부모님의 등골이 휘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수단으로 일주일 단식을 시도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듯, 저희 부모님 역시 7일 만에 악기 구매와 고액 레슨비를 보내주셨습니다.”

 

▲ 한식대첩 김혜숙 고수님과 함께

 

# 들어선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면 과감히 돌아서는 것도 용기다.

(이)“음대 지망생으로 휴일도 반납하고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비록 꿈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공부하니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고등학교 입학 후 3년 동안 비싼 레슨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뒷바라지 해 주신 부모님 덕분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작은 악기를 품에 안고 캠퍼스를 누비면 지나는 햇살도 걸음을 멈추고 저를 쳐다보는 듯 한 착각을 할 정도였지요.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1학년을 맞이했습니다. ‘계획은 늘 원대해야 이룰 수 있다.’는 선배 말에, 시작도 하기 전에 ‘음악의 도시로 유학을 꿈꾸고 있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른 후 어느 날, 아버지에게 병마가 닥쳤습니다. 더 이상 부모님의 도움을 바랄 처지가 못 되는 생활형편에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을 맞았지요. 이리저리 발버둥 쳐봐도 저는 붙잡을 끈이 없었습니다. 아니 섞은 동아줄이라도 좋으니 어느 날 내려주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겐 그 어떤 것도 내려주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고 누구에게도 저의 처지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지 않았습니다.

비가 참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문득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짧은 생이었지만 저의 지난날을 돌아보았습니다. 저를 위해 희생하신 부모님의 삶, 그리고 음악인으로서의 저의 삶. 분명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 갈 음악인의 삶을 생각하니 막막했습니다. 부모님 말마따나 돈 보따리를 풀어놓고 살아도 모자란다는 말이 백번 맞는 것 같단 생각에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았죠. ‘이 길이 잘못 들어 선 나의 길이라면 빨리 돌아서는 것도 용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들고 온 허브차를 벌컥벌컥 마시며 긴 한숨을 쉬었다. 자신 때문에 많은 희생을 하신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금세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기자도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깊이 공감해 주리라 다짐했다. 그녀가 내미는 허브차를 한 컵 받아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 대한민국 속물의 1인으로 조금은 씁쓸해짐을 느끼며

(이) “드디어 식구들 앞에서 선언을 했습니다. ‘일단은 휴학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 만약 지금 휴학하면 뒷바라지 했던 가족들의 희생이 물거품이 된다. 그러니 여한이라도 없게 졸업장은 손에 쥐어야 하지 않겠냐.’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저도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부모님의 딸에 대한 뒷바라지가 눈물겨웠거든요. ‘그럼 학교는 다니되 지금부터 어떠한 종류의 레슨도 하지 않겠다. 그냥 편하게 공부하면서 졸업장만 받겠다. 내가 손재주는 좀 있다는 거 아니까 일단 졸업하면 바로 악기 사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하겠다.’

운 좋게도 대학 졸업장을 가슴에 안는 동시에 바이올린 만드는 악기 사에 취직을 하는 행운을 맞았습니다. 꿈을 접으며 다닌 학교라서인지 제겐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어요. 결국 저 또한 졸업장을 중시하는 대한민국 속물의 1인으로 조금은 씁쓸해짐을 느끼며,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 떡·한과 폐백사진

 

# 악기를 처음 접했을 땐 그 자태의 멋짐에 반했다. 하지만 빵을 만들 땐 저의 혼이 접신을 하는 듯해서 짜릿했다.

(이)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음악의 길을 잃고부터는 더 이상 꿈이란 것이 존재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직장 동료로부터 한 남자를 소개 받았고, 사윗감으로 마음에 드신다는 아버지 핑계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겐 그와의 사이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얻었죠. 처음으로 아이를 안고 크게 웃을 수 있었고, 아이의 행복이 곧 엄마의 행복으로 하루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커 가면서 밥보다 빵을 주식으로 성장해 나갔어요. ‘밥을 먹여야죠. 아이가 좋아한다고 빵을 그렇게 주면 걱정되지 않으세요?’ 사람들이 근심의 눈초리로 저와 아이를 바라보며 혀를 찼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몇 날 며칠을 고심 끝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제과제빵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도전하는 만들기에서 정말 감사하게도 수강생들이 ‘손재주가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배우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선희씨의 손재주는 타고 난 것 같아’ 어느 날 원장님이 많은 분들 앞에서 저의 작품을 들어 보이시며 크게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선희 씨처럼 하면 됩니다.’ 민망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냥 신이 났습니다.

악기를 처음 접했을 땐 그 자태의 멋짐에 반했지만, 빵을 만들 땐 저의 혼이 접신을 하는 듯해서 짜릿했습니다(웃음)”

 

# 너무 동안(童顔)이라 이 바닥에선 먹히지가 않아. 그럴 땐 수면 아래서 잠시 쉬는 것도 한 방법이지.

(이) “아이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먹이고 싶어 시작한 곳에서 제과제빵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본격적으로 떡과 한식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지요. 세상에 나온 떡이 아닌 이선희만의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나가도록 끊임없이 공부하며 밤새워 만들어 보기도 여러 번. 문헌을 뒤적이며 얻은 지식을 총동원하여 만든 예술적 가치의 김치도 제겐 매력이었습니다. ‘선희씨 손을 거치고 나간 음식은 음식이기 전에 예술품이야. 정말 문화의 충격인 걸. 남들은 죽어라고 해도 힘들던데 선희씬 어떻게 눈썰미가 좋을까 몰라. 암튼 신기해 죽겠어.’ 여러 선생님들의 말씀에 힘을 얻어 대회에 참가를 했고 상(떡, 한과, 폐백. 이바지)을 타며 떡과 전통음식 강사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늦게나마 대학원 공부도 하며 말이죠.

그러던 중, 뜻밖의 말을 스승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선희씨는 참 동안이야 그치? 이 바닥에선 아무리 잘해도 얼굴이 너무 동안(童顔)이면 인정을 안 해줘.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한동안 실의에 빠져 음식을 만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괜히 반발심도 일어 ‘그런게 어딨냐’며 혼자서 울기도 했구요.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그 충격이 아주 오래는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마도 제 몸이 이미 알고 있었나 봐요(웃음). 제가 만든 음식 앞에서 번갈아 저를 쳐다보시는 선생님들의 애매모호한 눈길들.” 그녀는 한때 나이가 “한 육십은 훌쩍 지나버렸으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단다. “한복을 입으면 더욱더 어려 보인다.”며 기자 앞에서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했다. 참 세상은 불공평하다. 누구는 어려 보이려 발버둥 치는데 어떤 이는 나이 들어 보이려 발버둥 치다니. “제 나이에 이 일을 했다는 것이 너무 빨랐던 거죠(웃음)”

 

▲ 국제요리대회 대통령상 수상 작품 <탐라에서 백두까지> 앞에서

 

# <탐라에서 백두까지>로 대통령상 수상. 이북김치부터 대한민국 팔도 김치, 120가지 선보여.

(이) “벌써 이 길을 걸어 온지도 어느새 10여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기를 맡기고 서울로 다니며 음식을 배우고 익힌 지난 세월동안 고되고 힘든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 제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쉬는 동안 또 다른 계획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통음식문화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어요. 요즘은 발효식품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답니다. 막걸리도 만들고 식초도 만들고.

무엇보다 김치가 참 매력 있어요.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신 시원하고 정갈했던, 정말 맛이 일품이었던 그런 김치들 말이죠. 존경하는 김치 명인(名人) 이애라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 맛이 진짜 묘해요. 얼마 전 선생님 권유로 제자들과 함께 한국국제요리경연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문헌에 나온 것부터 시작하여 전국 팔도에 있는 발효식품은 모조리 연구대상이었어요. 열심히 준비 한 결과 <탐라에서 백두까지>라는 주제로 대통령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북김치부터 우리나라 팔도 김치 120가지를 선보였어요.”

활짝 웃는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 소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기자도 그녀의 웃음에 미소를 보이며 “많은 분들이 김치를 배운다 하면 배울게 뭐가 있냐고 하지 않나요?”라고 묻자 “아, 맞아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들 말씀하셨습니다.”라며 손뼉을 쳤다. 아직은 앳된 미소와 부끄러운 듯한 모습이 참 낯익은 여동생 느낌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김치지만 또 누구나 맛있게 담을 수 없는 것이 김치더라구요. 아직은 저도 배울 것이 참 많아 한참을 더 배워야 합니다. 앞으로 몇 년간은 전통발효 음식에 매진해 볼 생각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빠질 수 없는 된장, 간장, 고추장 같은 것들 말예요.”

밤이 깊어 추위가 깊이 내려앉을 즈음, 그녀는 따뜻한 보온병을 추스르며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기자의 손에는 그녀가 쥐어준 한과가 따뜻함을 간직한 채 들려져 있었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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