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서광사 도신 주지스님

최미향 기자l승인2018.10.04l수정2018.10.04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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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사 산사음악회에서 노래를 하는 도신스님

 

“짧은 한 토막의 노래라도 고통 받는 마음을 치유 한다”

도신스님 “노래는 구멍 난 가슴을 메워주는 친구이며 인생”

 

일반적으로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 기자와 인터뷰이의 대화 형식을 띤다. 하지만 도신스님의 인터뷰 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써 내려갔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이지만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택했다. -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 프롤로그

 

바람이 분다.

어느새 좀 전의 따뜻했던 찻잔이 식어 있다.

이럴 때는 먼지 쌓인 앨범을 넘기며 그리움을 달래고 싶다. 어린 시절, 사람으로 상처 받은 나였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결국 사람이 답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게는 또 하나가 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나는 노래로 인해 모든 걸 담대히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을.

 

▲ 한줄기 바람처럼, 물줄기처럼 지나 온 삶을 담담하게 풀어 주는 도신스님

 

# 01

본명 박금성. 사람들은 나를 도신스님이라 부른다.

나를 낳은 엄마는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만나 1남 3녀를 두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은 그리 멀리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면서 엄마는 4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우셔야 했고, 결국 삶이 버거운 어느 날 우리 식구는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나는 수덕사 동자승으로, 여동생 셋은 서류 한 장 남겨 놓지 않은 해외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함께 호흡을 했고, 함께 식사를 하며, 함께 꿈을 꿨던 나의 반쪽들. 그 반쪽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 02

“매일 밤마다 너를 찾아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엄마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하지만 엄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시간만 나면 몰래 나와 산 아래 길을 내려다 봐도 엄마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밤마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렸다. 이불속 세상만이 내가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가족의 공간이었다. 내 이불은 눈물 덕분에 깨끗한 날이 없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그렇게 나는 동자승이 되었다. 밥과 빨래를 했고 무거운 나무를 지고 날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도 내겐 믿음이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를 기다리는 하루하루는 어린 나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정서불안으로 열네 살 때까지 오줌을 쌌다.

그때 나를 보듬고 눈물을 닦아준 분이 계셨다. 엄마를 너무도 닮은 듯한 진제행 보살님. 떨어진 옷을 꿰매 주시며 엄마처럼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셨다. 보고픔에 몸살을 앓으면 밤새 내 곁을 지키며 나를 토닥여 주기도 했다. 나는 서서히 울음을 그쳤고 대신 보살님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행복으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고 처음으로 말 수가 늘었다.

 

# 03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보살님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절 문간에 서서 자주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날엔가 조심스레 노스님께 물었다. “스님, 진제행 보살님이 왜 안와요?” 스님은 헛기침을 하시며 “모른다. 세상 밖 소식은 이제 잊어라”는 말씀뿐이었다.

밤이 깊으면 작은 봉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에 보살님이 오실 것 같아 소스라치게 일어나 문을 열어보기를 수십 번. 결국 기다림에 지친 어느 날, 그분을 찾아 산 아래로 내려갔다. 물어물어 찾아 간 내게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해지기 전에 얼른 절로 돌아가세요.”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날까.’ 세상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어린 나이에도 업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시 아픈 날들이 이어졌다. 꿈을 꾸면 엄마의 모습 사이로 진제행 보살님의 얼굴이, 다시 젊은 시절의 내 엄마 얼굴이 스크랩 되어 나타났다. 그리운 엄마 품속에서 엄마 눈을 바라보며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다보면 엄마는 어느새 보살님의 모습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 04

진제행 보살이 돌아가시면서 나는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바깥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엄마처럼, 아니 보살님처럼 ‘따뜻한 분을 또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자주 절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찡’이란 이름의 강아지와 함께 절을 빠져 나왔다. 그래도 내 곁에 찡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스님들께 혼나거나 외로울 때면 찡이 살고 있는 큰 개집 안으로 기어 들어가 숨기도 했고, 그러다 잠이 들면 새벽녘 스님의 염불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다.

찡과 나는 먼 길을 걸어 해미에 도착했고 그길로 운 좋게도 중국집에 자장면 배달부로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한 달여를 일했고 다시 농촌 한우 사육을 하는 농가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찡과 생활을 했다. 녹록치 않았던 해미 생활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의지할 분은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유난히 햇살이 강한 어느 날, 나는 해미 생활을 철수하고 다시 절로 들어갔다. 그 당시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방으로 나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고개를 떨어뜨리며 들어간 내가 스님 앞에 무릎을 꿇며 용서를 빌자 법장 스님은 “이놈의 자식 한 번만 더 나가면 두 번 다시 안 받아 준다”며 무섭게 혼을 내셨다. 바깥세상을 나갔다 온 후 나는 서서히 세상 속 이름의 박금성에서 도신스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때는 모든 감정들이 하루가 다르게 사위어 가도록 빨리 늙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다. 더 이상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게 말이다.

 

# 05

아버지의 정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던 내게 법장스님은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을 주셨다. 절에서는 공부를 시키면 배워서 떠난다고 아예 시키지를 않는다. 노스님이신 벽초스님 또한 같은 생각이셨다. “한자라도 배우면 그거 써먹으려고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안 된다.” 하지만 법장스님은 “머리 기르고 나가더라도 사람이 사람노릇을 하려면 배워야 한다”라며 내게 공부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어느 날 밤, 스님은 몰래 나를 불러 “미리 서류를 넣었으니 너는 아무 말 말고 곧장 법주사 불교 승가대학으로 가거라. 뒤돌아보지 말고 바로 가야 한다. 여기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무거운 보따리를 든 내 손을 꼭 쥐어 주셨던 스님. 아버지의 손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나를 보시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던 내 아버지 법장 스님. 그날 밤 찡에게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그 길로 불교 대학에 입학을 했다.

 

# 06

2005년 9월 11일, 아버지 법장스님은 가을 어느 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곁에 계실 때는 몰랐는데 막상 떠나고 나니 그동안 내가 했던 모든 것들이 후회로 남았다. 공부 하라고 하면 딴전만 피웠던 철없는 나였다. 스님께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열반하시고 나니 하나에서 열까지 스님 손길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늘 깊은 날이면 슬픔은 배가 되어 가슴을 치게 했고, 당신이 세상에 안계시단 생각이 문득 들면 사무치도록 그리움이 더했다.

열반하시기 전날,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으로 침대 모서리에 왼손을 올려놓으시기에 “팔이 저리십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아니, 내가 팔을 올려놓으면 네가 와서 주물러 줄 것 같아서...”라며 희미한 미소를 지으셨던 나의 아버지. “너는 누가 봐도 스님 될 팔자다. 절대 중으로서 중심을 잃지마라. 자고로 중이란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게 중의 길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다. 절대 잊지 말아라.” 정말 듣기 싫었지만 스님 가시고 난 지금은 그 깊이를 젤 수 없는 아버지의 말씀에 가슴이 저리다.

 

# 07

사춘기시절, “노래만은 안 된다”고 말리셔서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법장스님. 그럼에도 노래가 좋아 그것만은 끝까지 놓지 않아 아버지 속을 섞였던 나. 엄마 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노래가 되어주어 그나마도 구멍 난 가슴을 메워주었기에 노래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내게 노래는 친구였고 인생이었다.

스님 몰래 돈을 모아 기타를 샀다. 잠시 짬이 날 때면 서너 고개를 지나 바위틈에 숨어 기타를 품었다. 가슴속에 마르지 않은 눈물이 노래가 되어 산으로 울려 퍼지면 세상 만물이 숨을 쉬는 듯 했다. 그러다 스님에게 들키는 날이면 기타는 박살이 났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그래도 노래 하나만은 포기하지 못했던 나였다. 서울 생활 당시, 서클을 만들어 승복을 입고 남이섬 강변가요제에 출전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똑같은 승복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밥을 먹으며, 똑같이 누워 잠을 잤던 절에서의 생활. 그렇지만 스님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내게는 내 속을 다스려주는 노래가 있었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내 속의 그리움과 번뇌가 일순간에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 08

1979년 광천 오서산 정암사에 머물던 때 중광스님을 수덕사에서 대면했다. 당시 행사 일환으로 절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들은 스님이 “노래 부르면서 포교하면 기가 막힐 것 같다. 시골에서 묵히지 말고 나를 따라 서울로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길로 스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 간 나는 본격적인 음악 수업에 들어갔다. 당시 나의 아버지와 같았던 법장스님은 더 이상 자식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묵묵히 나의 길을 응원해 주셨다. 나중에야 알았다. 스님은 단순히 노래를 한다는 이유로만 반대를 하신 것이 아니었음을. 고아로 절에 들어 온 내가 노래한답시고 바깥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꼬임이나 당하진 아닐까, 그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아니 잠들 때까지도 네 머리를 만져봐라. 그러면 네가 누군지 알 것이다. ‘나는 분명 중이다. 그래 중이구나’라는 걸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속세에 나가면 너는 분명 고생할 것이 뻔하다. 그때 누가 널 거둘 것이냐. 그렇게 되면 너는 또 다시 방랑의 길로 접어든다. 방랑과 여행은 엄연히 다르다. 여행의 마지막은 귀가지만 방랑의 마지막은 바로 ‘끝’을 의미한다. 우리 인생은 여행이란다. 너는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중이라는 생각을 머리에서 한시도 지우지마라.” 처음에는 반발심이 일었다. ‘왜 내가 중이지? 내가 선택한 길도 아니잖아. 어쩌다보니 내가 중이 되었던 거지 난 원래 중의 인생이 아니었어. 이건 너무 불공평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평정심을 찾았고, 스님이 내게 했던 그 말씀들이 바로 나를 잡아주는 큰 손길임을 깨달았다.

 

# 09

개인적으로 봤을 때 나 박금성은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하나 없는 천하의 고아다. 거기에 더하여 배움도 재산도 없는, 오직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고보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내가 행복을 찾으니 다른 사람의 아픔에 염려를 하게 되었고, 그들의 고통에 기도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들도 나처럼 노래를 들으며 힐링하기를 원했다. 노래는 지금의 나를 불교로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고, 욕망과 고독을 억압시켜 주는 고마운 존재기도 했다. 아무 가치도 없던 나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승화시켜준 노래.

이른 새벽, 도량석(道場釋:불교 사찰에서 새벽 예불 전에 도량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을 할 때는 목탁 대신 기타로 해보는 날도 있었다. 현대 악기가 가미된 퓨전 음악이 성지에서 울려 퍼지니 그것이 곧 아름다운 산사음악회가 되어 모든 만물이 힐링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똑같은 노래라도 절에서 듣는 것과 일반 무대에서 듣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염불소리만 해도 산에서 들을 땐 청정함이지만 세상 속에서 들으면 소음 내지는 공해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느냐 보다는 어떤 장소에 놓이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 노래하는 스님으로 유명한 ‘도신 서광사 주지스님’

 

# 10

서광사 산사음악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게 된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짧은 한 토막의 노래로도 상당한 치유를 받게 하는 것.’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광사에서 산사음악회를 여는 이유다. 직접 섭외를 하고 (개런티)절충을 해서 좋은 분들을 모시고 옴으로써 사람들이 치유되기를 원한다. 물론 여기에는 지역사회 많은 분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린다. 한 분 한 분들이 내게는 참 귀한 인연들이다.

특히 좁은 뜰에서 (산사음악회)하다 보니 되돌아가시는 분들이 계서서 안타까울 때도 많았다. 지난번 공연을 마치자 일부 시민들이 “서광사가 좁으니 넓은 곳으로 옮겨서 하는 것은 어떠냐?”고 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성질보다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스름한 저녁 속 산사는 잔잔한 세계가 있어 좋다. 이런 곳에서 음악을 접하다 보면 분명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밝아질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에필로그

 

내가 아는 ‘서산시대’는 바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론지필의 신문사다. 지금껏 잘 해왔듯이 앞으로도 서산의 바른 지팡이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특히 정치인들이 ‘서산시대’에서 보여주는 지팡이를 바라보며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이 되어주어야 한다.

시민들의 갈등 또한 객관적 시선으로 접근하며, 그 속에서 누구하나 억울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문사 역할이 아니겠는가. 아무쪼록 서산시대 이전을 축하하며 나날이 발전하는 신문사가 되기를 두 손 모아 합장한다.

 

아래 시는 <2018년 월간 우리시 신인상 당선작>, 나의 자작시다.

 

동자와 달

 

동짓달 새벽

동자의 목탁소리

달그림자 부른다

 

먹장구름 사이

달 기다리는 앳된 염불

도량에 넘쳐나는데

 

노 스님 기침소리

고목을 넘어가도

귀 밝은 달은 대답이 없다

 

달 그림자가 아니어도

동자의 목탁은 울어야 한다

 

목탁이 우는 소리에

천지만물이 아침을 시작한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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