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동희오토 박옥근 대표이사

최미향 기자l승인2018.09.19l수정2018.09.1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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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희오토 박옥근 대표이사

 

‘꿈이 없는 공장’에서 ‘희망의 공장으로’

기적을 낳는 대화는 ‘누군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에서 시작

70%의 화상 사고에서 다시 살아난 몸...동료들의 삶까지 살아야 할 의무 있어

 

# 기적을 낳는 대화는 ‘누군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동희오토 박옥근 대표이사는 경남 창원시의 마지막 끝자락 진전면에서 어머니의 탯줄을 타고 4남 2녀 중 삼남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가난을 벗기 위해 실업계를 졸업했으나 세상의 부조리를 보며 다시 학업을 지속하여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당시 존경하는 스승인 정민용 교수님이 “기업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다. 높은 생산성은 좋은 인간성에서 나온다. 또한 좋은 인간성은 굳은 신앙성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1983년 12월, 당시 봉고신화를 이룩하여 유명세를 타던 기아자동차에 입사했다. 그가 맡은 첫 임무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엔진 가공라인의 공정과 작업편성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분석 판독하는 일이었다. “데이터를 보고 불합리한 동선을 발견하면 그것을 개선시켜 주는 일을 했는데, 다른 동료 직원들은 주로 (현장에서근무하는 분들과)싸우고 오더라구요. 저는 해당 반장님과 조원들에게 사전 충분한 설명을 하고 나서 비디오 촬영을 했기에 아무 문제없이 원만한 작업 재편성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조원들의 반감은 커녕, 원만한 작업 재편성을 이룩하여 생산성 향상 및 작업편성 로스(손실)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 ‘어머니와 함께’ 동희오토 박옥근 대표이사

 

#흔들리면 안 된다. 우리의 존재감을 보여주자

1997년 우리나라에 IMF가 터졌다. 그때 대마불사(大馬不死) 즉, 바둑에서 대마는 쉽게 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계 4위였던 기아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말없이 떠나는 사람과 회사를 살리기 위해 남아있는 사람, 그 속에서도 또다시 자체적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속울음을 삼켰다. 함께 부대끼며 정들었던 분들이 떠날 때는 용광로 같은 슬픔이 가슴 언저리를 녹였다.

개인적으로 그는 기아자동차의 「모두가 주인이다!」라는 문화를 참 많이 좋아했다. 하지만 막상 부도가 나고 보니 계속 다녀야 할지, 그만 둬야 할지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담당 이사님이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면 안 된다. 우리는 기아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기아가 경영자질이 안되어서 망한 게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보여 주자. 우리의 존재감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나. 자존심을 지키자”라고 강력하게 만류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과 고민을 거듭한 결과 그는 잔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인수단(응찰단)들에게 설명을 하는데 그렇게 굴욕적일 수가 없었다. 떠나는 사람도 아픔이었지만 지키는 사람도 대못이 가슴에서 덜렁거렸다. 심적 갈등과 괴로움. 지금 와서 다시금 생각해봐도 먹먹하기는 매한가지다.

 

# 낯선 문화를 접하면서 ‘사람만이 답이다’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

현대가 인수자로 결정되었고 새로운 생산본부장님을 모시게 되었다. 현대의 낯선 문화를 접하면서 혼란이 일었다. 특히 현장을 다니면 ‘이래서 기아가 망했지 뭐.’ 라는 소리가 들릴 땐 정말 굴욕적이었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나서부터 세상에는 위도 아래도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그 옛날 교수님의 ‘사람만이 답이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약자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고, 더 배려하는 마음이 덤으로 주어지더군요. 지금도 저는 직원들에게 ‘절대 협력업체에게 군림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소공장’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지원하라’고 말합니다.”

 

▲ 방문객들에게 문화의 거리인 조립공장을 설명하고 있다.

 

# 꿈이 없는 공장에서 희망의 공장으로

“원칙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기준이다.”

2009년 1월, 그는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장에서 동희오토 공장장으로 부임했다. 내려오기 전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꿈이 없는 공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꿈을 상실한 기업이다.’ 뭐 이런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는 우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를 직원들에게 공유시켜 주고 싶었다. ‘꽃이 피고 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고, 또 시간이 지나면 결실을 얻는다’는 자연의 이치를 현장에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작업장에는 그러한 이치를 깨우쳐줄 화초들이 하나, 둘 수를 놓기 시작했다. 사계절 화초가 주는 푸른 생명의 빛으로 인해 마음 속 분노를 가라앉히는 살아있는 매개체 역할, 그것이 바로 변하지 않는 순리와 진리를 말이 아닌 맑고 푸른 화초가 자연스럽게 전해 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다음으로 했던 것은 사람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시와 그림을 곳곳에 게시했다. ‘요구하기 전에 현장을 밝고 맑게 바꿔주자.’ 하루 한번 꼭 라인을 돌며 직원들에게 ‘고생한다’고 등을 두드려 주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도 잘 맞추지 않던 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제가 잘 한 것도, 그분들이 의도적으로 웃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문화·예술과 생명이 우리 모두를 바꿔준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경차를 만들면서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 서산에 자동차회사를 설립하게 된 동희오토의 목적이였다. (노측이나 사측이나)노동자를 위하는 마음은 똑같은 것 아니겠는가! 더 맑고 밝은 작업환경 플러스 직원들의 따뜻한 마음, 이것들이 어우러져 모닝과 레이의 손끝 품질을 기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직원들과 술 한 잔을 앞에 놓고 참 많은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고 울었다.

그는 말한다. “수많은 변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지키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풀어집니다. 원칙은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기준이기 때문이죠.”

 

▲ 동희오토 직원들과 함께 ‘가을 추수 한마당’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회사를 다닌다면 너무 슬픈 일, 직원들이 행복하게 출근했으면 참 좋겠다

“현재 우리 직원들은 1당 100입니다. 그런 직원들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회사에 다니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행복한 마음을 갖고 출근했으면 좋겠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다니는 회사는 슬픔이라고 조용히 말하는 그는 철의 사나이지만 그 내면에는 문학청년의 피가 아직도 끓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빨리 회사에 가고 싶은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직장동료와 세상얘기를 나눌 수 있는 정감 있는 회사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정이 샘솟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요. 함께 웃는 직장. 생각만으로도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자긍심과 뿌듯함을 심어주기 위해 ‘환경을 밝고 맑게 하자. 내가 라인을 타는 사람이라면.’ 하고 생각해 본다는 박대표. ‘가능한 작업을 쉽고 편하게 일 할 수 있도록 하자.’ 구조적인 변화로 환경이 바뀌니 무엇보다 직원들이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진정성이 보이는 것 같아 기자도 “인터뷰 마치고 둘러보고 싶다.”고 했고 그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기자님이 조금 있다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 직원들의 작업복도 함께 다 수거하여 세탁소에 맡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데 과감하게 먹거리 개선을 했더니 식사 시간이 행복해집디다(웃음). 심지어 화장실에는 물고기들이 놀고 있어요.” 기자의 눈에 비친 현장에는 깨끗함은 물론 갤러리 「흐뭇한 길」도 있었고, 얘기 들은데로 물고기들이 여유롭게 유영을 하고 있었다.

 

# 생애 가장 잘 한 일은 속초태생 아가씨를 만나 결혼한 일

“그러려면 저부터 행복한 걸음으로 회사에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늘 새벽 5시 5분에 집을 나섭니다.” 때론 새벽 늦게까지 술자리를 할 때도 그는 여전히 그 시간대다. 기자가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나마도 벽에 기대어 1시간 쪽잠을 자고 옵니다. 누워버리면 못 일어나거든요(웃음)” 그의 아내는 불편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없이 늘 안전하게 잘 갔다 오라고 한단다. 그럴 때마다 아내를 보며 어머니를 연상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아내를 만난 것이 제 생애 가장 잘 한 일인 것 같아요. 일밖에 모르던 늦깎이 총각이 38살에 속초태생의 아가씨에게 장가를 갔지 뭡니까. 그것도 약속시간보다 3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저에게 ‘그럴 수도 있다고, 괜찮다.’고 했으니 말 다했지요. 두 아이들을 낳을 때도 함께 있어주지 못하고 늘 퇴근 후에나 병원으로 달려갔던 무심한 남편이었습니다. “기자님도 아시다시피 그때는 산업화 세대라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저와 비슷했을 것 같아요. 일과 회사와 국가는 한 몸이라고 생각하며 산업 역군으로 모든 열정과 역량을 바친 우리 세대들 아니었겠습니까? 어쨌거나 참 감사한 (아내)사람이죠.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도 집사람을 참 좋아했어요. 아버지는 이런 집사람에게 신뢰의 상징으로 당신 비자금관리까지 맡겼다 아입니까(웃음). 그것은 바로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죠.”

 

▲ 반장들과 함께 단합 워크샵

 

# 철의 사나이들이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닦는 모습, 그것이 문화다

그는 직원들에게 문화를 많이 접해주고 싶은 소망이 있다. 지난 8월 31일 서산시와 함께 했던 런치콘서트도 하나의 좋은 예였다.

그가 문화를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었다. (소하리)공장장 시절에 외부강사를 초청하여 문화강좌를 한 적이 있었다. 일반적인 국민들의 정서는, 공대 출신자들은 눈물이 메말랐을 수도 있겠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당시 문화 강의를 들은 400명의 직원들이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 강사를 초청하여 인문학 강의를 듣겠다고 했을 때 부회장님의 질타가 있었다. 그때 아래 직원이 걱정하기에 “(소하리)공장장이 교양강좌 하나도 맘대로 못하면 무슨 공장장이냐. 그럴 것 같으면 공장장 그만둬야지. 내 말 믿고 그대로 진행하라.” 끝나고 난 후 소감문을 받으니 다들 좋았다며, 가족과 회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며 앞으로의 삶의 지향점은 뭔지를 깨달았다고 그렇게 행복해 했다. 그것이 바로 문화였다. ‘향후에도 좀 더 많은 (문화·예술)기회를 직원들에게 제공해 주고 싶다.’ 그는 당시, 자신과의 약속을 지금 하나하나 지켜나가고 있다.

 

# 덤으로 사는 내 인생, 앞으로도 직원들과 함께 눈높이를 맞추며 살고 싶다

그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했다.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어요. 1986년 6월 10일, 1년 후배가 생산관리 야간당직인데 아버지 제사라고 바꿔 달라는 겁니다. 알았다고 하며 근무를 섰죠. 남의 당직이니 얼마나 신경 썼겠습니까. 당시 프라이드 라인이었는데 ‘마지막 컨베어라인에서 기름 주유를 해야 한다. 기름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라인이 서면 큰일이거든요. 급히 현장에 가보니 지하탱크에 기름이 누유 되어 상황이 무시무시했습니다. 공간이란 공간에는 모두 가스로 꽉 차 있어 어떻게 손 놓고 있을 수 없었어요. 정말 비상사태였죠. 불꽃이 튀면 안 되기에 먼저 보수작업에 참여한 보전 직원들에게 ‘허리띠의 금속버클을 풀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바라를 들고 플라스틱 통 속에 2인1조로 (지하에서)기름을 퍼 담기 시작했지요. 바로 그때, 한 직원이 선풍기를 코드에 꽂으면서 삽시간에 그곳은 불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스가 많이 묻어있고 축축한 저의 몸은 불이 붙기 딱 좋은 상태였죠. ‘아 모든 게 끝났구나!’ 불이 붙은 몸으로 바로 옆 식당에 뛰어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70%의 화상, 제 몸은 살아날 가망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한강성심병원에 몇 달을 입원했는데 입원 일주일 만에 입사동기와 보전주임을 잃었습니다. 온 몸을 칼로 째는 듯한 고통과 뭉뚱그려진 내 귀. 밤새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지만 차마 눈을 감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옆 침대에 함께 입원하며 서로를 응원했던 직원 두 분의 죽음이었어요. 왜 나에게 이런 시련과 화상의 고통을 내렸냐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했습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고 기자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저는 기적처럼 어느 날, 이렇게 다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제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그저 감사함입니다. 뭉뚱그려진 귀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불에 녹아 흉측하지만 제 팔은 부끄럽지 않은 훈장이 되어 직원들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더 이상 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아까운 동료들의 삶까지 저는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이주직원 화합 한마당잔치

 

# 넝쿨식물이 차가운 철을 걸치고 파란 하늘로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햇살이 참 고왔다

가족들이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며 살고 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또 다른 우리 (동희오토)1,750명 가족들이 그의 곁에서 함께 웃으며 행복 나누니 무엇보다 축복이라고 말하는 박대표. 한솥밥을 먹고 함께 탈의를 하며 그렇게 오늘 하루도 같이 움직이는 것이 제일 큰 행복이라고 한다. “어이쿠,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네요. 이제 현장으로 나가 직원들을 만나야 할 시간입니다. 인터뷰 감사했습니다.”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의 따뜻한 체온과 함께 털털한 웃음소리가 파장이 되어 빈 공간을 메웠다.

기자가 급하게 마지막 꿈을 물었다. “일본 도요타의 30만대 공장과 대결하여 품질과 원가, 생산성 등 모든 면에서 한번 이겨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자동차회사에 몸 담은 국민으로서, 또한 글로벌 자동차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산업역군으로서의 책임 아니겠습니까.” 대표자실 창밖으로 보이는 넝쿨식물이 차가운 철을 걸치고 파란 하늘로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햇살이 유난히 고왔다.

 

▲ 큰 형님 손주를 안고 있는 동희오토 박옥근 대표이사와 가족들

 

아래 시는 철의 사나이 동희오토 박옥근(62) 대표이사가 승진에서 누락된 젊은 친구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그대는 청춘’이란 자작시다.

 

슬퍼마라 청춘이여

 

찬바람 몰아치는 적막한 밤

그대를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

또 그대를 지극히 사랑한 사람도

제각기 바쁜 걸음을 하며

떠나가 버린 텅 빈 허허로운 밤

 

높고 험한 산

겁 없는 욕망으로 오르고 또 올라

마주친 벼랑 끝

좌절과 분노 그리고 절망

 

잠 못 이루는 작은 방을 나와

저 끝없는 우주와 눈을 마주하면

은은한 푸른 달빛은 달빛대로

반짝이며 쏟아지는 별빛은 별빛대로

진한 생명으로 제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리라

 

울지마라 청춘이여

아무리 매서운 칼바람 긴 겨울이라도

따사한 햇볕 몰아오는 푸른 봄은 오리니

봄날이 오는 어느 길목에서

기별없이 피어난 매화꽃

그윽한 생명의 향기로

메마른 그대 가슴을 채우리니

 

슬퍼마오 청춘

울지마오 청춘이여!

젊은 피 용솟음치는 힘이 남아 있는 한

그대 가는 길은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대! 빛나는 청춘이니까.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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