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갑골문자의 대가인 시몽(是夢) 황석봉 선생

최미향 기자l승인2018.09.05l수정2018.09.0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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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몽 황석봉 선생

 

‘서산창작예술촌’은 현대서예의 메카다!

현대서예미술관으로 정식등록되는 것이 나의 ‘소중한 꿈’

 

<대문을 열며>

비오는 날, 그것도 갑골문자의 대가인 시몽 황석봉 선생(서산창작예술촌 관장)의 보이차 퍼포먼스. 

현대서예의 메카에 서 계시는 분이 밤새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친 기자에게 선사한 뜻밖의 선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맑은 얼굴에 보이차 한잔을 따르면서 혹 뜨거울까 차가운 냉수를 잠시 타준다. 한 모금 넘기는데 목젖에서 덜 말린 풀내음이 풍겨난다. 입을 꾹 다문채 넘기는데 뭔가 추억같은 것이 꿀꺽하고 넘어간다. 

“반 발효차는 살짝 풀냄새가 나나봅니다. 처음 먹어보는 연한 맛이예요. 푸른 초장에 누워있는 착각 같은 그런 맛이랄까? 아무튼 비오는 날 마시니 운치있는 수채화의 주인공 같은 느낌입니다”라고 하자, 그것은 4~50년 전 우리나라 자연퇴비 만들 때 그 상황이네요. 그러다보면 우리 기자님의 나이까지도 유추할 수 있는데...(웃음)” 갑자기 나이 얘기에 마른 기침이 터져 나온다.

 

▲ 보이차 한잔을 따르면서 혹 뜨거울까 차가운 냉수를 잠시 타주는 시몽 황석봉 선생

 

차를 마시며 통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는 것. 이는 아마도 세상 말 못할 비밀을 모두얘기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다. 그것이 누구이든 어떤 사연이든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있잖아요. 사실은 저에게....’ 같은 말로 시작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 혼자 듣기에는 왼쪽가슴에 쌓인 이야기가 너무 진해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 지금부터 무게감을 덜어주기 위해 시몽 황석봉 선생의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모실까 한다. 당신은 적당히 이 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함께 공감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Q. 태어나면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나?

(황) 후천적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관절에 아주 골치 아픈 녀석인 골수염이 찾아왔다. 당시는 변변한 병원이 없다보니 세심한 치료를 받을 수 없어 장장 3년을 앓았다. 그때는 무슨 병인지도 몰랐고 민간요법을 비롯한 안 해 본 치료가 없었다.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서울에서 가까스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실상은 그때까지 방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는 반 의사가 되어 주사도 직접 놓으셨고, 심도 박으시며 나를 간호했다. 그런데도 골반 쪽 수술한 곳에는 살이 안 나오더라.

세상에는 불가사의 한 일들이 종종 일어날 때도 있다. 주위에서는 곧 죽는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는 나를 업어다 구룡리의 어느 산약으로만 고치는 의원에게로 데려갔다. 치료가 아주 장난하는 것 마냥 우습더라. 하루 한 번씩 와서 골반 쪽 막창 뚫린 곳에 새끼 꼰 것을 환부에 찔러 넣었고, 때론 아궁이의 따뜻한 재를 사서 파스처럼 환부에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달이 안 걸려 뚫린 곳에 살이 나오더라.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Q. 서예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있었나?

(황) 걷지를 못하니 집안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할 일이 없더라. 어느 날 아버지가 당진에 계시는 맹천술 서당선생님을 모시고 왔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3남 4녀중 장남인 아들이 종일 방안에서 누워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2년 동안 서당선생님께 사서삼경을 배웠다.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말로 선생님은 서당을 파하고 떠나셨고, 그 길로 나는 서울 큰누님 집으로 올라가 미처 마치지 못한 학업을 마져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몸이 낫고 열심히 생활하던 어느 날, 우연히 사서삼경을 가르쳤던 당시의 서당선생이 서울 중앙대학교 앞에서 서당을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물어물어 찾아 가 보니 스승님은 대학생과 교수들을 상대로 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는 재회를 했고 그때부터 왕래를 하며 한학을 배워 나갔다. 어린 시절 배움을 주시면서 함께 기거했던 그때처럼, 재회함과 동시에 우리는 다시 한 집에서 뒹굴며 생활했다. 이런 것만 봐도 서예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내게 주어진 하늘의 길이 아니었나 싶다.

대학은 성균관대학 도서관학과를 다녔다. 사실 서예과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학과였다. 그 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여전히 서예에 대한 배고픔은 상상할 수 없는 허전함을 심어주었다. 불현 듯 속에서 서예가 하고 싶어지면 밤새 혼자서 끙끙 앓았다. 어느 날부터 안되겠다 싶어 유명한 서예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그때 만난 사람이 인사동에서 서예연구실을 운영하시는 학남 정환섭 선생이었다. 틈만 나면 나는 그곳에서 글을 썼고 숙식을 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연소 국전입선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필두로 서예에 발을 들여 놓았다.

 

▲ 작품 ‘꿈’ 작업

 

Q. 상형문자인 갑골문을 처음 선보였다. 어떤 이유라도 있나?

(황) 상형문자인 갑골문을 처음으로 선보인 사람이 바로 나다. 그날이 아마 눈 오는 날이었던 것 같다. 장독대에 눈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가만히 보니 아주 순수한 상형문자가 찍혀 있더라. 그게 뭔지 궁금하지 않냐? 아주 재미있게도 새가 밟고 간 발자국이었다. ‘눈 온 겨울날 새벽, 새가 걸어간 것과 같은 발자국’ 그것이 내가 처음 갑골문자를 본 느낌이다. 그날부터 매료되어 꾸준히 갑골문을 출품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세 번 연달아 특선을 했고 이로 인해 초대작가가 되었다. 물론 그전에 다른 서체로도 여러 번 입선을 했었다. 그후 15년에 걸쳐 초대작가가 되었다.

 

Q. 궁중도서 목록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해달라?

(황) 성균관 학생시절 교수님이 프로젝트를 하나 맡아 왔는데 바로 창경궁 안 장서각이라고하는 곳에서 조선왕조 궁중도서 30만권의 목록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한중일 고문서와 그림, 글씨 등이었는데 왕실도서니 얼마나 어마어마한 도서였겠는가.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제격변기를 지나면서도 누구하나 손댄 적이 없는 도서였다. 프로젝트 인원은 겨우 7~8명, 먼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을 정리하는 팀의 학생이 겨우 그 정도니 진도가 나가겠는가. 그것을 등으로 짊어지며 옮겼고, 먼지를 털며 그렇게 하나하나 목록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연대와 저자가 어떻게 되며, 목판본인지 목활자본인지 아니면 금속활자본인지를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작업. 그것은 끝없는 자신과의 사투였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 곳을 나왔다. 곧이어 졸업을 했고 도서관학과와 관련된 도서관 사서직으로 정식 공무원이 되었다. 문화공보부의 문화재관리국 장서각사무소가 나의 첫 직장이다.

 

Q. 두 번의 이직이 있었다는데 그 이야기를 해달라.

(황)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창경궁 안에 있는 곳이 문화공보부의 문화재관리국 장서각사무소다. 그곳은 봄이 되면 난리도 아주 그런 난리가 없다. 일본의 꽃이라 일컫는 벚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가 하면 민족말살정책으로 동물원을 만들어 놓았고, 심지어는 건물까지도 뾰족한 일본식 건물로 지어 놓았다. 한동안 이런 모든 것들로 인해 회의에 빠진 적도 있다. 지금은 다 헐어 한국문화연구원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곳에서 3년을 근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돌아보니 내가 없어져 있더라. ‘아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나는 작가로 나가야 한다. 그만두고 나오면 서예공부에 깊이 있게 매진할 수 있을거야.'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사표를 썼고 망설이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1년을 놀아보니 너무 추웠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다시 기아자동차 인사과에 입사했다. 기업이 그렇듯 퇴근시간이 없었다. 죽지않을만큼 부려 먹었고 개인시간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국전에 입선했던 사람이 국전에 출품할 작품이 없어 출품을 하지 못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업무로 인해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활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기아자동차에서 근무했다. 그곳에 근무하면서 결혼을 했다. 물론 3개월 만에 사표를 던지고 프로패셔널의 길로 들어섰지만...

회사를 그만 둔 이유는 단 하나, 작품을 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 당시를 돌아보면 천길 낭떠러지처럼 어찔하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작품을 팔아서 생활하리라 다짐했던 그 시절. 나는 여태껏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 풍류로의 초대 퍼포먼스

 

Q. 중앙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런데 왜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결심했나?

(황) 당시 부담없이 관내에서 작품활동을 해달라는 의왕시장님의 제안을 받았다. 그분의 도움으로 작품 활동을 위한 공간을 제공받고 작품에 매진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생활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더라. 동시에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현대서예와 전각을 가르치는 교수로도 13년을 활동했다. 학생수만으로도 1천명이 넘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도 비행기 타고 와서 배우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멀리 강원도와 거제도에서도 새벽같이 올라 오는 학생이 있었다. 버스타고 전날 숙소까지 잡아서 오시는 분이 한 둘이 아니니 정말 열성들이 대단했다. 아마도 불원천리(不遠千里), 즉 아무리 먼 길이라도 마다않고 달려간다는 뜻인데 이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 서산시여성대회 퍼포먼스

 

Q. 서산에서의 생활은 만족했나?

(황) 내 고향은 서산시 성연면 예덕리다. 서산시청 관계공무원들이 몇 번 찾아와 “고향을 위하고 서산시민을 위해 서산으로 내려와 달라”고 했다. 내 성향은 맞다고 생각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다. ‘고향에서 부르니까 얼마나 기쁜 일이겠냐. 내 남은 인생은 고향에서전부 풀어놓고 가야겠다. 그동안은 중앙무대에서 누릴만큼 누렸다. 어떻게 보면 승승장구하고 화려하게 활동하지 않았나.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으니 더는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계약서상에 숙식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사인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왔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기쁜 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5톤 트럭 5대에 작품을 싣고 내려왔다. 동네사람들이 피난 온 줄 알았다고 놀라워들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였다. 정해진 내용이나 도움없이 그렇게 3년을 보냈다. 비상금은 3년만에 동이 났고 나는 한계에 도달했다. 3년이 지나고서야 서산시에서 대책이 나왔고, 그것이 보완이 되어 지금은 마음 편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Q. 서산시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황) 처음부터 일관되게 “현대서예미술관으로 정식등록을 해라. 하겠다고 하면 작품은 다 기증하겠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방문 당시 연구용역까지 했다. 그런데 보고받을 즈음 서산시청에서는 교항님 맞이로 총력을 쏟을 때라 그런지 (연구용역에)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말을 했는데 결국 (서산시청에서)결심을 못하더라. 연구용역 보고에 의하면알겠지만 여기 있는 건물 그대로도 미술관 등록 요건은 된다. 물론 작품 100점도 이미 갖추어져 있고 말이다. 다만 학예사와 큐레이터가 필수로 있어야 된다는 것만 갖추면 충분하다. 평수는 자격 요건이 된다지만 현재 보시다시피 전시장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수장고도 포화상태다. 확장할 필요가 있다. 혹시 우리 시에서 예산가지고 망설인다면 강원도 백담사 입구의 여초서예관을 보면 답이 나온다. 강원도 인제군이 인구 3만이 채 안되는데도 국비를 지원해 완공했다.

이곳 ‘서산창작예술촌’은 그곳보다도 더 환경적으로 갖추어진 곳이다. 특히 서산시의 관객 수준은 여타 시도보다도 상당히 높다. 서산시가 타의 지자체에 부러움을 살 정도로 (예술인 영입)시도 자체는 굉장히 빨랐다. 이제는 한 단계 높여 백년대계의 프레임을 세워야 될 때다. 

 

▲ 황석봉 선생은 “진정한 현대서예의 메카가 되려면 영구적인 프레임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Q.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

(황) 현대서예미술관 등록이 꿈이다. 확고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서산시민들 입장에서는 오지라고, 멀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볼 때는 결코 오지가 아니다.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경치 좋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제는 문화 자체가 차를 가지고 찾아다니는 문화다.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이곳은 경치가 좋은 곳에 이미 자리를 잡았다.

나는 제도적으로, 영구적으로 서산시민 내지는 전 국민이 찾아올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서예계에서는 내가 앉아 있음으로 해서 이 지역이 이미 현대서예의 메카가 되었다고 명실공히 자부한다. 하지만 진정한 메카가 되려면 영구적인 프레임이 나와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나는 여기에 대한 의견을 (서산시에게) 한번 들어보고 싶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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