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흥 초대 민선 서산시장 부부

“실력이 있고 없는 건 백지 한 장 차이...공직자는 청렴결백이 최고의 실력이다”

“소통이란, 자신을 뽑아 준 사람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

 

“더운데 얼른 집에 들어가 계시오. 저는 논에 물꼬 대고 오리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 뵌 김기흥 초대 민선 서산시장. 기자가 김기흥 전 서산 시장을 만나러 간 것은 약속보다 15분 일찍 도착한 시간이었다. 정순왕후 생가 앞 400년 된 느티나무 그늘에 주차 시키고 막 내리는데 검은 우산을 바쳐 들고 나오시며 말씀하신다.

유난히 따가운 날씨 탓에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검정 우산을 들고, 일복 차림으로 휭하니 논둑길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

이분이 사는 방식은 누구보다 평범했고, 정치인이자 농부라는 이름이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시장이면서도 챙기는 삶이 아닌 퍼주는 삶을 살았던 그에게 어떤 생각들이 자리 했을까?

김 전 시장을 보면서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 대통령이 연상되는 것은 그의 시장시절 일화와 무관하지 않다. 무히카 대통령은 재직 시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주고 자신은 꽃 농장에서 아내와 마누엘라라는 이름의 다리가 세 개뿐인 개와 살고, 대통령이 받는 월급중 90%는 빈민 주택 사업, 자선단체에 사용했다.

김 전 시장은 재임기간 중 첫 월급 외에는 단 한 푼도 집에 들고 오지 않고 이웃을 위해 썻다. 또 내 집이 있는데 관사는 왜 들어가냐며 시골 음암 집에서 출퇴근했다.

무엇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하면서 거점 마을을 기준으로 각각의 마을 일들을 하나하나 챙겼고, 퇴근을 하면 여느 농부와 마찬가지로 벼의 생장과정을 관찰하며 물꼬를 돌아보는 농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주섬주섬 기자수첩을 챙기며 안으로 들어가니 정갈한 한옥의 아름다움이 따뜻하게 기자를 품어 준다. 참 곱다.

 

▲ 안뜰에 있는 샘물

“시민들이 많이들 궁금해 하십니다. 잘 계셨습니까?”라고 묻자, “나이 여든 넘은 늙은이를 고맙게도...”라며 겸연쩍께 웃으신다. 하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초대 민선 1기 시장으로서의 당시 어려운 상황과, 지금의 민선 7기 서산시의 행보에 대해서도 기탄없는 의견을 주셨다. 지역에는 원로가 있다. 사람들의 표상이 되며, 큰 어른으로 지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 김기흥 전 시장의 서산시의 발전에 대한 고견과 시민에 대한 끝없는 애정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다음은 김기흥 초대 민선 서산 시장과 사모님과의 일문일답이다. - 최미향 기자

 

“제2의 무히카, 너무도 평범했기에 특별한 사람”

권력을 따르기보다는 상식을 신뢰하는 실용주의자 김기흥 초대 민선 서산시장

 

▲ 김기흥 서산시장선거 포스터(1995년, 1998년)
▲ 김기흥 서산시장선거 포스터(1995년, 1998년)

 

Q. 그 당시는 어떤 시대였나?

 

(김) 여전히 군사정권의 획일적이고도 통일된, 지시에 의해 움직였던 잔재가 상당부분 많이 남아있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민선 시장으로서의 ‘주민 의견수렴 반영’은 무엇보다 어려웠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부분은 기관들의 타성이 대부분 감시체제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탈피하고 주민 위주의 행정을 하려니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특히 못된 관권에 아부하는 횡포, 권력과 돈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등에 업고 행정에 편승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행위. 당시의 세상은 안 믿어지겠지만 그랬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시장실에 앉아 있는데 윗선에서 청탁전화가 와요. 자기와 잘 아는 사람이 사업을 하는데 나한테 압력을 행사하는 그런 전화였습니다. 제가 역정을 내며, “하려거든 계통 통해서 정식 문서로 지시해라! 당신 전화 받고 움직이는 것이 서산시장이냐!” 그러고 났더니 일이 터진 겁니다.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우리 시에 15명의 감사원 직원들이 일주일간 감사를 시작한 거예요. 한번 눈 밖에 나면 그렇게 횡포를 부리는 시대였습니다.

 

Q. 초대 민선 시장으로서의 어려움이 많았을 줄 안다. 역할과 책임, 소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나?

 

(김) 당시 시장실은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동안 시민들이 꾹꾹 눌러 참고 쌓아두었던 불평불만과 요구사항들이 봇물 터지 듯 한꺼번에 폭발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도떼기시장이었습니다.

저는 시민들의 표를 가지고 당선된 것이니까 안 들어 줄 수도 없고. 취사선택을 하려니 정말 어려웠지요. 심지어는 시민들이 어떻게 알고 집으로도 민원을 잔뜩 담아 쫓아 왔어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했으니 안 식구도 그 사람들 대접하랴 힘깨나 들었을 겁니다.

“장마 져서 돼지가 떠내려가는데 시장이 그것도 안 건져주고 뭐하냐?” “개집에 불났는데 조치를 취해 달라” 등 등. 그동안은 억압된 행정과 획일적인 지식과 통제에 숨이 막혔겠지요. 왜 그랬겠습니까. 맨날 혼나고 처벌 받는데만 익숙했던 시민들이었어요. 그러다 드디어 본인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 줄 민선 시장이 자신들의 손으로 앉혀놨습니다. 그분들에겐 이것이 바로 단비였겠지요.

그런데 제 입장은 좀 달랐습니다. 민선으로 당선 된 시장이라 해도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일일이 다 들어 줄 수도 없고, 챙겨주자니 한도 끝도 없고. 이야기 들어주는 것이야 어려운 게 뭐 있습니까. 경청하고 공감하고 함께 아파해주고...여건이 되는 대로 해결해주는 노력을 할 수 밖에요. 무엇보다 시민들과의 소통이란, 자신을 뽑아 준 사람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통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들고 상대가 아프면 자신도 아프다는 믿음 말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민선 23년 차가 되다 보니 많이 정착 되었습니다.(웃음)

 

Q. 민선7기가 시작되었다. 현안문제가 만만치 않다. 조언을 한다면?

 

(김) 개인적으로는 현 시장과 인사만 하는 처지입니다. 그동안은 노선도 달랐고 연령적인 차이도 많고 해서 현 시장이 어떤 포부를 가지고 행정을 할는지 저는 솔직히 잘 몰라요. 하지만 확실한 건, 지역 현안문제들은 현명하게 잘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쓰레기 소각장, 터미널 이전, 지곡 오스카 산업폐기물처리장 등 주민갈등이 내포된 현안문제가 많습니다.

쓰레기장을 살펴보면, 안하면 우리 서산시 쓰레기 어디에 버립니까? 1호 광장에 버려요 시청 앞마당에 버려요? 누가 하든 해야 되는 일이지 반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왜 당진 것을 받느냐는 것인데 이는 억지입니다. 서산시가 당진 쓰레기를 안 받으면 설치시설비를 지원받지 못해요. 얼마가 되었던 간에 보조를 안 해 줄뿐더러 시설 자체도 승인이 안 납니다. 그러면 서산 쓰레기는 어떻게 합니까? 현명한 방법으로 서로 한발짝 씩 양보를 해야 될텐데 큰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문제해결에 하루 이틀 걸릴 일들이 아니예요. 제가 있을 때부터도 쓰레기장 때문에 날마다 데모를 했습니다. 지금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당시는 굉장히 심했어요. 사실 반대하는 사람들도 할 얘기가 있습니다. “왜 쓰레기장을 하필이면 내 지역에다 하느냐? 소각장이 필요하긴 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 지역에다 하느냐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지역 이기주의 발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 비행기 소음 때문에 인터뷰가 잘 안되지요? 그렇습니다. (사모님을 쳐다보시며)공군비행장 소음피해 때문에 우리 식구는 귀 장애를 받았어요. 이 사람 외에도 장애를 받은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TV도 못 보고 전화도 못 받아요. 그런데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왜 우리지역만 피해를 보느냐와 똑같은 얘기죠. 대한민국은 지금 님비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다음은, 터미널 이전문제입니다. 언젠가는 옮겨야 된다는 것에는 모든 시민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있는 곳은 서산시의 발전을 위해서도 향후 걸림돌이 돼요. 사실 동부시장 점포는 시 소유입니다. 제 생각에는 죽기 살기로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현명한 방법으로 해결하면 못 풀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현 시장은 제가 알기로 상당히 미온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듯 보여 졌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대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서산시의 시장이 되었으니 어떻게 풀어 나가실지 지켜볼 일입니다.

쓰레기장 문제도 터미널 이전 문제도 그 분들의 권익도 보호해 주면서 현명하게 풀어나가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Q. 임기제 선출직 시장으로써 3선을 하지 않고 스스로 중단을 했다. 이유는?

 

(김)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제 나이 65살. 공무원의 퇴직연령보다 5년 정도를 더한 셈이더라구요. 특히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열 대여섯명 정도 있던 시청 친구들도 모두 일선에서 퇴직했습니다. ‘나만 이거 늙어가면서 혼자 근무할 까닭이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지더라구요. 물론 민선이라는 것은 구십이 되든 백 살이 되든 당선만 되면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말입니다. 기본적인 ‘기준’이 있지 않겠습니까? ‘(3선이)너무 과욕이 아니냐? 시민을 위해서 좀 참신한 사람이 선출되어 운영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오랫동안 정열을 바쳤으니까 또 바칠 것이 무에 있겠는가?’ 오랫동안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도의원과 시장을 거치면서 16년이란 긴 시간을 공직생활에 몸담았습니다. 무엇보다 2선을 마치면서 많은 부분들이 정착되었고, 제가 없더라도 더 나은 분이 나오셔서 해주실 것으로 확신했었습니다.

(사모님) 집으로 돌아오니 우리 집 양반 얼굴이 활짝 폈습니다. 이뻐졌어요.(웃음)

 

Q. 재임기간 중 단 한 푼의 월급도 집에 갖다 주지 않았다는 얘길 들었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에 썼나?

 

(사모님) 아니에요. 잘못 알았습니다. 첫 월급 약 270만원은 통장에 담아서 저에게 가져다 줬어요. 그 돈이 너무 귀하고 황송해서 장롱 깊숙이 넣어놓고 쓰지를 못했어요. 그 다음 달에 이 양반이 다시 통장을 달라고 그래요. 그동안 깊이 넣어두었던 통장을 꺼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끝이었어요.(웃음) 그 이후 더 이상 생활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왜 안가지고 오냐는 둥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양반을 믿었거든요.

(김) 저는 월급 받아 생활하지 않아도 삼시세끼 먹고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내가 농사짓는 쌀이 있겠다 뭣이 걱정입니까. 제가 시장에 취임한 것은 월급을 받기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돈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랬기 때문에 월급을 집에 가져다주지 않고 자치행정과에 맡겨 적절한 곳에 쓰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어요. 당시 7월1일, 시장 취임을 하고 보니까 6개월 업무추진비로 남은 게 고작 2,6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6개월로 나눠보니 한 달에 약 430만 원. 서산 시청 직원들이 당시 1,016명이었어요. 그 돈 가지고는 직원들 회식 한 번도 못해주는 돈이었습니다.(웃음)

그리고 자치행정과는 그 돈도 아마 부족했을 겁니다. 당시는 어째 그리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든지 하루가 다르게 사고였어요. 말이 공무원수가 천명이지 천명이란 숫자는 정말 많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음주로 붙잡혀가는 사람, 교통사고 내는 사람, 자기들끼리 싸움해서 경찰서에 가 있는 사람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아픕니다. 공무원이라고 다 반듯한 신사들만 있겠습니까? 그거 다 수습하고 관리를 하자면 돈으로 하는 건 아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 돈이랑 연관되는 게 많습디다.

예를 들자면, 교통사고만 하더라도 그래요. 지금이야 보험이 잘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보험도 별로 안 들었던 시대 아니겠습니까. 자기들끼리 말로 해결하는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예요. 그거 다 관리를 하자니 돈 4~5백만 원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월급을 아예 통째로 맡겨버렸어요. 그렇게 커 온 것이 초대 민선 시장 자리였습니다.

한 가지 일화를 들자면 이런 일도 있었어요. 그 당시 농·축협조합장들의 업무추진비를 봤더니, 그곳들은 2~3억 원이 남았더라고요. 시장은 6개월에 3천만 원인데. 이거 나라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생각했습니다. 이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나 싶어 행정자치부로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돈 벌려고 해서 이런 거 얘기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잘못된 것은 뜯어 고쳐야 일을 하지 않겠나. 이렇게 해놓고 무슨 놈의 일을 하냐.” 부아가 치밀어서 말입니다.(웃음)

 

Q. 재임시절, 당시 시장은 관사를 사용했는데 집에서 출·퇴근했다 이유는?

▲ 김기흥 전 시장이 거주하고 있는 서산시 음암면 조선 영조대왕의 정순왕후 생가 고택

(김) 자기 지역에서 살다가 시장으로 나오는 사람치고 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집이 있는 데 관사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냥 자기 집에서 출·퇴근 하면 되지.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부시장에게 나는 내 집에서 살겠으니까 부시장이 관사에서 살라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주장합니다. 관사는 객지 사람에게나 필요 한 일이고, 시·도·군수 정도 되는 사람들은 굳이 관사가 뭔 필요 있냐고요. 이제사 제 말이 조금 먹히더라구요.(웃음)

(사모님) 사실 당시에는 한 번 들어가서 하룻밤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양반은 말도 못 꺼내게 하더라구요.(웃음)

 

Q. 정치란 무엇이며, 공직자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

 

(김)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것 보다 제 생각을 말하자면, 저는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살리는 것이 곧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네들끼리 계파가 어떠니 당 차원에서 이익은 무엇이니 논하는 것은 국민들에겐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일들이에요. 패권싸움은 자기들끼리의 문제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자고로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해요. 이론으로만 잘 포장하고 뒤로는 자기들끼리 싸움질하다 판나는 거, 그거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관선이 되었건 민선이 되었건 공직자는 청렴결백해야 합니다. 다른 건 없어요. 똑똑하고 똑똑하지 않고 하는 것도 누가 청렴하냐 부패하냐 하는 기준입니다. 실력이 있고 없는 건 백지 한 장 차이밖에 안돼요. 누가 됐든 간에 말입니다.

공직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고 청렴해야 하며, 너무 인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맞춰가야 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봐요. 저는 그렇게만 되면 자연히 원칙대로 가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실력인 것입니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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