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는 투명하고 맑은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는 일종의 의식”

▲ 맹현미 화백

“내게 커피는 사랑이다”

‘커피 마시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 보고 싶은 게 꿈

# 프롤로그

평상시와 다르게 짧은 잠을 마무리하고 일찍 기상을 했다. 바깥에는 습한 공기와 함께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평상시 바라만 보았던 작가님을 직접 대면하고 인터뷰를 하는 날이다.

노트북을 켜고 선생님께 질문할 내용을 점검하는데 자꾸 실실 웃음이 난다. 오전에 나는 ‘해미 갤러리 카페’에서 커피를 진하게 마실 것이며, 맹현미 화백 얘기를 턱을 괴며 들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정겨운 인상의 맹현미 화백(55)을 만나러 가는 길. 대학원 원우들과 교수님을 모시고 자주 들렀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다른 마음가짐이다. 서산시 해미면 휴암1길 28. 갤러리 문을 살포시 밀고 들어서니 환한 웃음의 작가님이 커피를 내리는 손을 위로 올리며 나를 건너다보신다.

“기다리진 않으셨죠. 작가님?” 나의 인사말에 “많이 기다렸습니다. 작가님” 우리에게 서로의 호칭은 사장님도 기자도 아닌 작가님으로 통한다. 맹 작가님이 예의 맛나고 진한 커피를 타오는 동안 필자는 갤러리 카페에 걸린 작품을 두리번두리번 보며 평상시 감탄대로 또 감탄을 내뱉는다. 

 

▲ 맹현미 작가가 가장 아낀다는 작품 ‘기다림’ 

 

# 어느 봄날, 커피향 짙은 곳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작년이었다. 늦깎이 대학원 신분인 필자는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선배들의 권유에 이끌려오게 되었다. 커피내음이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그곳에서 향기를 온 몸에 적시기 위해 한참 동안을 서성거렸다. 사실 커피도 커피였지만 커피와 함께 존재해 있던 벽면의 화폭들이 꽃의 깊이로 내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튿날 퇴근길, 필자는 일부러 빙 둘러 다시 그 길 위에 섰다. 나의 발길을 유혹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흩날리는 풍경에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까.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고 했다. 드디어 그 해답을 알았다. 오래보고 싶어서 작은 여행을 온 것이고, 다시 필자가 유난히 좋아하는 ‘기다림’이라는 작품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작품 얘기를 듣고 싶어요. 나무의자와 비둘기에 관해서요.”

때마침 뜨거운 커피를 들고 오시는 맹현미 작가의 발목을 붙잡고 싶어졌다. 수줍은 얼굴로 살포시 찻잔을 내려놓는데, 언뜻 보니 내 큰언니를 닮은 것처럼 편안하다.

“모닝커피를 참 좋아해요. 초창기 서산에 ‘커피린’이 처음 오픈했을 때 저는 아침 일찍 그곳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시고 출근을 하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무심코 바라다 본 곳에 나무의자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거예요. 그 자리는 그리운 이를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기다리기도 하는 그런 자리잖아요. 한동안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거예요. 그때 뭔가 제 가슴 한켠이 허전하고 외로워졌습니다.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저 비둘기는 바로 저의 자화상이지요. ‘기다림’이란 작품은 이렇게 제 속으로 낳은, 제가 가장 아끼는 작품입니다.”

뜨거운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필자가 곧 그녀가 되어 붙박이처럼 그렇게 앉아있어야 했다. 기다림의 그 쓸쓸한 잔향은 오래도록 가슴 한 쪽을 아프게 하며...

 

▲ "꽃 그림을 볼 때는 세로토닌이란 ‘행복 호르몬’이 생성된대요." 맹 화백의 꽃을 주제로 한 작품.

 

# 잠시 잊혀 둔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초대’였다

“엄마, 오늘은 앤틱스런 분위기에서 좀 쉬고 싶어.” 

기말고사 시험이 끝났다는 고등학생 딸아이의 제안으로 늦은 밤. 다시 해미 갤러리 카페 문을 열었고, 잔잔한 미소와 바쁜 걸음으로 손님 사이를 누비는 화백님을 뵐 수 있었다.

“서울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우아한 실내분위기와 여전히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맑은 작품들이 나는 좋아.”

그곳에 걸린 작품 하나하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아이들도, 과도기적 삶의 변화를 몸으로 직접 느끼며 힘들어하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도 위안을 주는 나와 마주하는 ‘초대’의 선물이다.

“사실 수채화는 좀처럼 당선되기 어려운데 ‘초대’라는 작품은 작년 안견미술대전에서 수채화로는 유일하게 특선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날 그녀는 딸의 학업문제로 행사 당일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때마침 작품을 감상하시던 한서대학교 총장님 부부와 참석하신 분들은 그림의 주인을 찾아 단체로 카페를 찾아오는 기현상을 빚었다.

“수채화 그림을 좋아해주시는 것도 모자라, 직접 저를 찾아 주시니 얼마나 감동스러웠던 지요. 그분들은 그날 이후부터 저희 집 단골이 되셨습니다. 때로 가슴이 허할 때 훌쩍 다녀가시기도 한답니다.”

필자는 마른 침을 넘기며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딸 아이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으며 그녀의 작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꽃꽂이 같기도 한 작품, 그래서 다시 가까이 다가가 보면 너무도 평면적이어서 자세히 바라봐 지게 하는,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작품 ‘초대’.

“이 작품은 놀랍게도 바로 식탁보예요. 그 옆에는 촛대가 놓여있고 양초가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오질 않아요. 결국 그 사람이 올 때까지는 양초를 켜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뿐이 아니에요. 나비 한 마리가 여전히 문을 응시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죠?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여전히 기다림은 계속 될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보지 못한 곳에 한 마리 나비가 심쿵 가슴에 내려앉는다. ‘뭔가 커다란 공백이 있다 했더니 바로 청순함이었구나!’

 

▲ 안견미술대전에서 수채화로는 유일하게 특선을 받은 작품 ‘초대’

 

# 작품 속에서 ‘아름다운 슬픔과 기대에 찬 희망’을 발견하다

그녀의 삶에는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선이 곱게 자리하고 있다. 그림에 대한 재능과 사유 등을 잊지 않고 상기시키며 하얀 도화지에 그려내는 작업은 그녀 나이 겨우 9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그 당시에는 여느 집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림을 배운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잖아요. 그냥 좋아했어요. 참 많이. 그러다 우리 세 딸들이 그림을 배우면서 저도 그 선생님에게 배워보리라 마음먹었죠. 그리고 9년 전,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당시의 아이들 그림 선생님께 떼를 썼습니다. 가르쳐 달라고 말이죠.(웃음) 그렇게 해서 본격적인 저의 그림은 시작되었습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냐는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드셨다.

“전시를 위해 새벽 3시까지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단 한 번, 그만둬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왜냐하면 불안했거든요. 갱년기로 힘들어 질 저를 위해, 그리고 제2의 저 같은 분들을 위해 돌파구가 필요하다 생각되었어요. 지난번 서산시 문화회관에서 전시한 ‘갱년기를 극복하자’란 주제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주위의 어려운 분들에게 문화예술 파급효과는 상당하다고 들었거든요. 특히 그림중에서도 꽃 그림을 볼 때는 세로토닌이란 ‘행복 호르몬’이 생성된대요. 즐겁고, 잠도 잘 오고 식욕도 줄고, 호르몬 분비도 잘되고, 거기다 의욕도 흥미도 생겨 성취감을 잘 느끼고, 어려운 환경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것도 있고. 아무튼 어마어마한 것들이 예술 속에 녹여져 있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저는 꽃그림 그리는 걸 멈출 수가 없어요. 저에게 그림이란 ‘아름다운 슬픔인 동시에 기대에 찬 희망’입니다.”

 

 

# 나는 소망한다.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맑고 청순한 자연의 색채에 치유되기를

‘클로드 모네’를 참 좋아한다는 그녀, “빛과 그로 인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평생 동안 연구하며 그린 그의 색채 감각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문득 모네의 작품 중에 유난히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궁금하여 여쭈어 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눈망울에 촉촉한 습기 비슷한 액체가 묻어난다. 깜짝 놀라 당황스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필자에게 괜찮다며 살짝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예술가답게 순수하다.

“모네의 대표작 ‘수련’을 좋아해요. 이 작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는 정원에 앉아 오랫동안 명상하듯 연못과 그 위의 수련, 연못 위에 비친 나무 그림자와 구름 그리고 빛에 따라 달라지는 이 모든 사물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하는 작업을 했지요. 빛과 반사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변화를 오랫동안 관찰한 나머지 그의 시력은 망가지게 되었답니다. 시력은 급격히 나빠졌고, 설상가상으로 백내장에 걸린 모네는 세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청시증과 황시증에 시달리다 결국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는 약하게 시력이 남은 오른쪽 눈만으로 말년에 수련 대장식화를 완성하고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며 생을 마감하지요. 그는 참 멋진 화가였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색채를 닮아보고 싶어요. 그리하여 맑고 청순한 자연의 색채에, 힘든 분들이 아낌없이 치유되기를 소망합니다.”

 

▲ 저에게 그림이란 ‘아름다운 슬픔인 동시에 기대에 찬 희망’입니다. 맹 화백의 꽃을 주제로 한 작품.

 

# 내게 커피는 사랑이다. ‘커피 마시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 보고 싶은 게 꿈

맹현미 작가의 커피 솜씨는 깊고 풍부한 부드러운 맛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은 커피와 함께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읽은 책에 영감을 얻어 붓을 드는 일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

얘기 듣는 도중 홀짝홀짝 마신 커피가 동이 난 걸 알아채시고, 얼른 일어나 정성껏 내린 커피를 다시 찬찬히 잔에 채워주시는 모습이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다.

“커피가 작가님에게는 무엇인가요?” 필자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사랑입니다”라고 말하며 찰랑찰랑 채워진 잔을 필자 앞에 내민다.

“앞으로의 계획은 ‘커피마시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 보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공간이 없어 전시를 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공간을 무료로 대여하며, 함께 전시도 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이죠. 사실, 유명하신 분들이야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합니다. 하지만 지역에서 취미로 작품 활동 하시는 분들은 장소 때문에 애를 먹어요. 전시 한 번 하고 나면 실력도, 생각도, 자신감도 많이 느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꿈과 희망이 생기지 않겠어요? 더 늙기 전에 부지런히 준비해야지요.”

‘더 늙기 전에’란 단어를 듣고 화들짝 놀란 필자가 70세 나이에 손녀가 쓰고 남긴 물감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골 농부, 미국의 ‘그랜마 모제스’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1600여점의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갑자기 행복해졌다는 표정으로.

 

▲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색채를 닮아보고 싶어요. 그리하여 맑고 청순한 자연의 색채에, 힘든 분들이 아낌없이 치유되기를 소망합니다.” 맹 화백의 꽃을 주제로 한 작품

 

# 에필로그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그녀는 시간을 들여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었다.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디서 영감을 얻었으며, 어떤 과정으로 그리게 되었는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작품을 대하는 순수한 정성과 애정이 꽃향기 가득 진하게 울려 나간다.

그녀의 작품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바로 새와 나비. 어쩌면 그녀 자신일수도 타인일 수도 있다. 커피를 사랑하고 그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맹현미 화백. 

만나서 대화하고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이 시간을 필자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가져가려 한다. 어느 날 문득 ‘커피 마시는 풍경’ 초대를 받으면 펼쳐보지도 않고 나는 그녀란 걸 알게 될 테니까.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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