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류종철

이 글은 2018.4.19. 서산 동문동성당에서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김 다울신부님의 강연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글의 내용 게제를 허락하신 신부님께 감사를 드린다.

 

정치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부패, 싸움, 거짓말 등 부정적인 단어가 주를 이룬다.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는 종교이야기와 함께 대화에서 금기시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이미지의 정치에 무관심해지기 쉽고 소극적으로 되고 따라서 투표 행위도 정치적인 분별력 없이 대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치란 권력의 획득, 분배, 그리고 그 권력을 사용하는 행위로 모든 일상에서 우리가 알든 모르든 행해지고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만큼 정치는 우리 일상에 항상 존재하면서 우리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일상이다.

교회의 정치관은 무엇인가? 교회에서의 정치는 인간과 공동선의 결합이다. 정치공동체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 삶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차원의 일부로서 정치생활의 토대와 목적은 인간, 즉 인간의 존엄성에 있다. 즉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태어난 존귀한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 즉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모든 행위를 정치라고 바라본다. 말로는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몸으로는 행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실천 없이 말로만 이루어진 신앙의 성전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는 마테오복음서에서 돌 하나 남김없이 성전은 허물어질 것 이라 말씀 하신다. 예수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야 하늘나라에 오른다”라고 말씀하셨다.

공동선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보장함으로써 드러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권리는 약자, 소수자들의 권리를 의미한다.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진정한 공동선이 아니다. 다수의 의견과 다른 소수의 의견과 가치를 공동으로 보장하는 것, 그것이 정치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의 개념이다. 정치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Demos(민중)와 Kratia(지배, 통치)의 합성어에서 유래한다. 즉 민중에 의한 의사결정과 통치를 의미하며, 왕권이나 소수 통치자에 의한 통치와 대별된다. 민주주의는 집단지성이 발휘되지 못하면 우중(愚衆)정치로 흐를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제도 자체가 선이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느냐 또는 아니냐에 따라 그 열매의 결실이 결정된다.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반론이 크다. 정교(政敎)의 분리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특히 종교인들 중에도 많이 있다. 사회의 모든 현상은 그 구성원인 인간과 관계가 된다. 인간이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가 걸어야 하는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길은 인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종교는 사회문제에 대한 모든 것, 즉 정치와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복음의 기쁨 97항에서 “신앙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여서는 안 된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 내면과 관심사에만 국한된 지평에 갇혀 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사회 질서와 공동선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회문제는 너와 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약자, 소수자들에 대한 태도를 반성, 성찰하고 그 불평등을 유발하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공동체 의식을 요구한다. 그는 정치를 가장 고도화된 형태의 사랑이라고 설파한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우중들에게 넘길 때 물로 손을 씻음으로써 책임을 회피한 것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손을 씻을 수는 없다. 교황은 어느 수도회에서의 문답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맹세한 신앙들인에게 “사회에 무관심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말한다.

선거의 계절이다. 사회의 모든 현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선거에서 진정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정치행위의 기본적 의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특히 소수자와 약자의 존엄성을 지켜주려는 공동선의 정신, 우리가 가져야 될 정치적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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