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춘/시인·서산향토문화연구소

자전거에 몸과 마음을 올려놓고, 그리고 덤으로 생각과 그리움을 올려놓고, 콧노래로 페달을 돌려 봄나들이를 떠난다. 휘발유 한 방울 필요 없이 페달만 밟아대면 자전거는 아지랑이 속으로 빨려들듯 포장된 농로 마을길을 달려 나간다. 마음속은 화창한 봄볕으로 꽉 들어찬다. 가슴속은 후끈후끈 싱숭생숭 종잡을 수 없지만 기분은 상큼하다.

길 가녘의 가로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부의 거친 살결이 죽은 몰골이었다. 나무가장이도 관절염을 앓는 손가락처럼 툭툭 불거져 있었다. 이제 나무들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연초록의 잎사귀를 뾰족뾰족 내밀어 할래할래 흔들 것이다. 나무의 모습을 보니 나도 나무의 삶을 닮았으면 싶다. 내 마음을 위로해주듯 나뭇가지를 흔들흔들 흔들어준다. 플라타너스의 마른 겉껍질이 볼썽사납게 뒤틀리어져 있더니 어느새 새순이 돋는 기쁨에 찬 얼굴로 봄이 오는 길목에 내 마음처럼 서있다. 나무들로 인해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숲길을 달린다. 동화 속 같은 깊은 숲길이다. 그리움이 도사린 깊은 계곡 안창 포근한 고갱이이다. 부부처럼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손잡고 기대 서있는 바위에 걸터앉는다. 시원한 솔바람 한줄기가 뒷목을 후려잡았다 풀어놓고 지나간다.

애벌레 한 마리가 발등에 톡 떨어진다. 어디서 벌레가 떨어졌을까? 무의식적으로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 연초록이파리들 사이로 언뜻언뜻 파란하늘이 보인다. 잎이 피어나기가 무섭게 연초록 잎을 갉아먹은 벌레는 벌써 알을 낳으려고 보금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키 작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안쪽으로 벌레는 잽싸게 기어가고 있다. 하릴없이 숲 속을 거니는 나에 비하면 그래도 벌레는 나보다 낫다.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알을 낳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숲 속 길을 그는 기어가고 있지 않은가.

목표도 없이 봄의 정령에 끌려 나온 나에 비하면 벌레는 지금 할 일이 많고 무척 바쁜가보다. 벌레가 기어가는 길가엔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민들레꽃, 개나리꽃, 진달래꽃, 제비꽃, 이 외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빨강, 노랑, 보라, 형용색색으로 피어 자태를 뽐내며 하늘거리고 있다. 더러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더러는 바람에 히죽거리며 미소를 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며 얌전한 새색시처럼 새침하게 서있기도 하다.

뻐꾹! 뻐꾹! 뻑 뻐꾹! 뻑 뻐꾹!

성황당 고개 쪽에서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뻐꾸기울음소리가 들린다. 뻐꾸기울음소리를 들으면 마음은 괜스레 감상적이다. 공연히 울렁거리고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진다.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어쩔 줄 몰라 설레발칠 정도다. 이것이 춘심이란 것인가. 벌레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들린다. 환희와 희열에 찬 그들만의 독특한 음율 이다. 벌레의 결혼식인가보다. 가만가만히 귀는 귀대로 기울이고, 눈은 눈대로 풀 섶을 살핀다. 암컷과 수컷의 흘레 시간이다. 새파란 풀잎 위 푸른 침대에서 거행되는 벌레의 결혼식 짝짓기 장면이다. 내가 다가가도 아랑곳없이 엑스터시의 경지에 빠져들고 있다. 신이 내려준 그들만의 시간이다. 나무, 풀, 벌레, 삼라만상이 다 나름대로 바쁘다.

봄의 정취에 못 이겨 자전거로 무작정 봄나들이 나선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봄의 손길은 따뜻하고 아름답고 포근하기도 하다. 산과 숲에서 내뿜는 그들의 숨소리는 향긋하다. 가슴속 구석구석에 묻어있는 때가 씻기어내리 듯 마음이 할랑할랑하다. 숲의 따뜻한 손길은 나에게 맑고 깨끗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한다. 숲, 그에게서는 새소리가 들린다. 싱그러운 미네랄냄새가 난다. 그의 겨드랑이에는 옹달샘이 조잘거리고 조약돌이 졸졸졸 노래를 부른다. 그의 가슴은 서늘하고 포근하다.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헝클어진 번뇌는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나뭇가지사이로 하늘을 보면 베토벤의 자장가 경음악이 은은하다.

어머니 숨소리 같은 솔바람소리를 들으며 햇살을 껴안고 푸른 풀밭에 누우면 만사태평 잠이 온다. 물가에 가면 옷깃이 젖는데, 숲에 가면 마음이 젖는다. 숲은 희망이 꽃피고 미래가 숨 쉬는 곳이다. 봄나들이 나온 묘령의 소녀하나 봄이 오는 언덕에서 흥얼흥얼 봄나물 향기 뜯는다. 꿈 뜯는다. 그리움 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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